인사동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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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인사동(거리의 오른편이 인사동)
서울은 조선시대에 한양이라고 불리었으며, 1394~1910년까지 조선의 수도였다.
현재의 서울은 한강에 의해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한강의 남쪽은 서울이 아니었으며, 서울은 청계천이라는 작은 강에 의해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으며 청계천의 남쪽은 남촌, 북쪽은 북촌이라고 불리어졌다.
풍수지리사상에 의하면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 곳이 명당으로 알려져, 북한산과 청계천 사이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만들어졌다. 인사동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인데 예부터 충훈부, 의금부, 우정국 등 정부 부속기관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관리, 학자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인사동에 많이 살았다. -
조선왕실의궤
경복궁 근처에 위치해 있는 인사동에는 조선시대에 도화업무를 담당했던 관청인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는 나라의 다양한 의식이나 행사 또는 초상화 등을 그리는 예술작업이 이루어지는 관청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 장례, 다양한 행사 등과 같은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동감 있는 그림과 글로 기록한 조선왕실의궤등이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회화의 전통은 도화서 화원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그 업적을 이어가는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진자료가 없었던 시대에 도화서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현재 조선시대의 문물과 의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로서 도화서로 인하여 인사동에는 자연히 이름난 화가들과 그림도구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필방과 한지가게 같은 상점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였던 대표적 화원들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등과 같은 분들이 있었다. -
김홍도 (金弘道) (1745(영조 21)~?)
단원(檀園) 김홍도는 그림솜씨가 뛰어났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제대로 그림공부를 하지 못했다. 호조참판(戶曺參判) 강세황(姜世晃) 앞에서 그림을 그려, 그 실력을 인정받아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되었다.
1771년(영조47) 왕세손(뒷날 정조)의 얼굴을 그렸고, 1781년(정조 5) 어진화사(御眞書師)로 발탁되어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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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사동은 한국인의 삶과 역사와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조선왕조 (1392-1910) 때부터 근 600년 동안 서울의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 예술 관청이었던 도화서가 위치해 있어 일찍이 예술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당대 유명한 화가들이 이곳에서 예술 작업을 펼칠 수 있었다.
인사동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지역은 관인방, 견평방, 대사동계, 탑동계 등의 방(坊),계(契)명이었는데 1914년에 동(洞)으로 명칭을 개칭하면서 관인방(寛仁坊)의 인(仁)자와 대사동(大寺洞)의 사(寺)자를 조합해서 인사동(仁寺洞)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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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인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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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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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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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가 집결하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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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1910년부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어 양반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상류층이었던 북촌에 거주하던 양반 계층이 붕괴되었다.이를 계기로 점차 상점화 하기 시작한 점포들 중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던 골동품상이 있었으며 이곳에 의해 몰락하기 시작한 양반들 소유의 도자기, 고서화 및 고가구 같은 골동품들이 인사동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인사동이 골동품의 거리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진 후 조선총독부와 가까이 위치한 인사동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의 고미술품들을 수집해가는 슬픈 역사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서울의 중심지인 인사동에는 역사적 명소가 많으며 특히 3.1운동의 대표적 본거지로 독립운동의 발원지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3.1운동 유적지인 태화관(태화빌딩)과 탑골공원, 승동교회, 천도교 중앙대교당, 조선건국동맹터, 독립선언문 배부터등 많은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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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1960년대 후반기부터 고미술, 화랑, 표구점, 지필묵 등이 주종을 이루면서 1970년경에는 최초의 근대적인 상업적 화랑이 인사동에 모여들게 되어 화랑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인사동이 작가, 예술인, 미술애호가들의 1987년에 인사전통문화보존회가 창립되고 2002년 인사동이 한국 최초의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인사동은 골동품점, 화랑, 공예품점, 지필방, 한국요리와 전통차 식당 등이 모인 전통문화 거리로 변모하게 되었다.
매년 봄, 가을 인사동에서 개최되는 인사전통문화축제는 고미술, 현대미술, 공예품 전시와 국악공연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차없는 거리’지정 및 ‘전통문화의 거리’ 지정에 따라 살아있는 박물관을 표방하고 있다.만남의 장소가 되자 전통차, 전통음식 식당이 많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1980년대
1990년대
1980년대
2000년대